[중고] 2003 350p 

 ‘표정훈’ 이름 석 자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독서인! 세상에는 ‘책벌레’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어느 정도 되어야 벌레라 불릴 수 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심기일전하는 뜻에서 머리 스타일을 바꿀 때, 팔 걷어붙이고 책장 정리를 다시 하는 사람, 지하철 옆자리의 사람이 읽고 있는 책 제목을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남들에게 변태로 오해받을지언정, 새 책의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를 음미하는 게 행복하기만 한 사람, 다른 일에는 물에 술 탄 듯 흐리멍텅할지라도 책 고르는 일에서만큼은 깐깐하다 못해 집요한 사람,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고가의 가전제품이나 인테리어 소품은 안중에도 없이 그 집의 서가부터 눈에 들어오는 사람, 약속 장소는 꼭 서점 근처로 잡아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 읽고 싶은 책이 절판되었는데 헌책방에서조차 찾기 힘들면 약오르고 아쉬워서 밤잠을 설치는 사람, 꿔준 돈 못 받은 건 잊어버려도 빌려준 책 안 돌려준 친구는 용서 못하는 사람, 변변한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 가면 문자금단 현상이 일어나 사흘 이상을 못 버티는 사람, 저 높은 하늘에 있는 천당은 거대한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일간지의 북섹션이나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책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만약 당신이 위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당신은 영낙없는 벌레, 책벌레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국가대표급 책벌레이자 독서광, 탐서주의자인 표정훈의 신작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는 책세상과 웹세상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유쾌한 편력기이자, 책의 망망대해로 항해를 나선 사람들을 위한 미더운 나침반이다. ‘교양’의 참의미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인’ 전자책과 사재기, 증정본 문제 같은 출판동네 이야기부터 인터넷 문화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지적 안테나(인포스피어)는 전방위로 자유롭게 뻗어나간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고전에 관한 표정훈식 성찰과 옹호, ‘책값’이 언제까지고 절대적으로 쌀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느림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누리는 ‘열린 책읽기’의 쾌락, ‘학술출판’이라는 미명하에 대학생 주머니 털기에만 여념이 없는 교재 출판사들의 횡포에 대한 따끔한 지적,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는 투자하지 않은 채, 청소년에게 무조건 책을 떠안기는, 이른바 컨텍스트를 무시한 텍스트 위주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 등, 일급의 독자이자 출판동네의 이곳저곳을 잘 아는 번역가, 그리고 칼럼니스트인 저자만의 경험에서 우러난 날카로운 성찰은 우리의 일그러진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미래를 위한 가장 안전한 투자는 어린 아이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믿고, 양서 한 권을 읽는 것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만큼이나 가치있는 일이라 믿는 저자는 얼핏 고리타분한 책만능주의자, 혹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날로그 인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저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턱없는 오해에 불과하다. 실제로 출판 관련 사이트 “궁리닷컴”의 운영자이자, 후일 자신의 묘비명에 “위대한 넷서퍼 표정훈, 여기 잠들다”라고 새겨주길 바란다는 농담을 던질 만큼 전형적인 디지털 인간인 저자는,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현재의 인터넷 문화, 디지털 환경에 일침을 가한다. 즉 현재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다른 정보, 혹은 첨단의 단말기가 아니라 정보의 더미 속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게 해줄 인문학적 안목과 지혜임을, 그리고 그런 지혜를 얻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곧 독서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어쩌면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진부하고 하품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들을 해박한 지식과 넘치는 위트로 흥미롭게 풀어간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도 ‘사람의 무늬’는 필요하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인터넷의 은하계로 바뀐다 해도, 은하계를 수놓는 수많은 별 하나하나는 ‘사람의 무늬(인문/人文)’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성숙과 섬세의 정신이 있을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독서는 바로 그러한 정신의 훈련이며, 다양한 종류의 훈련을 강도 높게 쌓은 사람만이 참으로 넓고 깊은 지식을 체득, 활용할 수 있다. 이른바 “지식정보국가”는 “클릭! 인터넷 속으로”가 아니라 클릭하기 전의 지난한 정신의 훈련, 곧 독서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껍데기에 연연하지 말고 알멩이를 충실히 채워나갈 것을 역설하는 저자는, 그러나 무조건적인 지식의 축적만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참다운 ‘교양’이란 책상물림의 척척박사 머릿속에 든 지식이 결코 아니며 한 사람의 인격,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격에 바탕한 것임을 강조한다. 세상에서 가장 남는 장사 ‘독서’ 책에 관한 메타책이자, 독서에 관한 메타독서인 이 책은, 지식을 넓혀주고 성찰을 이끌어낸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교양서이지만, 깊고 넓은 책의 숲, 디지털 정보의 망망대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요긴한 지도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일급의 실용서이기도 하다. 최소의 것을 투자해 최대의 것을 얻어내는, 세상에서 가장 남는 장사인 ‘독서’를 등한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책세상 최고의 안내자 표정훈과 함께 책읽기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보자. 표정훈과 함께라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어 내 본연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던가. 이제 번잡한 세상사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들 본연의 모습을 찾아 떠나보자.